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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충남여행길 공모전 게시판충남을 방문하신 분들의 소중한 기억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저마다의 특색있는 경험을 즐거움과 미소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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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가 반드시 건너오라던 논산의 미내다리

  • 출처이**
  • 등록일2017-06-08 17:40:35
  • 조회수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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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어른이 인형을 갖고 놀아도 흉이 되지 않습니다. 바비인형부터 액션 피규어까지, 서양의 인형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인형은 어떤 형태였을까요. 우리나라에선 사람의 모형을 ‘각시’나 ‘꼭두’라 불렀습니다.
 나무로 만든 꼭두를 한자로는 목인(木人)이나 목우(木偶), 괴뢰(傀儡)라 표현했죠. 우리나라에선 꼭두나 탈에 신령이 접해 있다고 믿어 아이들이 갖고 노는 건 흉하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놀잇감으로서의 꼭두는 드물고, 상여를 장식했던 꼭두가 여럿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여에 장식된 저승사자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승사자는 대체로 갓을 쓰고 포를 입고 괴수(怪獸)나 호랑이를 타고 있는 형상을 한다. 저승사자는 염라대왕과 강림도령과 함께 나무로 따로 만들어 상여의 맨 꼭대기 용마루에 꽂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상여에는 다른 장식물도 함께 달려있게 되는데, 이들은 용과 봉황 등의 초월적인 상상물에서 귀면과 저승사자와 같은 신격 그리고, 연꽃과 호랑이, 병아리 등 현실적인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를 아무 탈 없이 저승까지 이를 수 있도록 보호하는 구실과 저승에서 온전하게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구실을 합니다.
 또, 상여에 달려있는 풍경은 상두꾼이 그 풍경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온히 운구하라는 의미와 함께 심산벽곡에 가서는 맹수를 쫓기 위한 금속성을 내라는 상징물에 다름 아닙니다.


 한국의 민속에 전하는 염라대왕은 인정이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염라대왕께서 “남천 모자(모래무지) 먹어봤냐?” 한다는디’

  ‘호남무가(湖南巫歌)’에 이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서면 천당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를 심판할 때 팔도 별식 33가지를 먹어 보았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를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천당으로 보내고 못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지옥으로 떠밀어 버리는데, 그 팔도별식 33가지 중에 “남천 모자 먹어 봤냐?”가  소개됩니다.
 여기서 남천이란 전주천이고, 모자는 모래무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쳐 천당가기는 애시당초 글렀다 싶었는데, 요즈음 전주천의 물이 많아 모래무지가 살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갑습니다.
 예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고 했나요. 삶과 죽음의 질서를 오가며 생긴 기막힌 사연이 배어 있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염라대왕이 대경실색합니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습니다. 고을 원님은 이같은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백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진천 땅 추천석의 혼백이 들어간 지금의 추천석은 생전에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볼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됩니다. 한편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합니다.
 불교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 중유(中有)라는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당장에 저승길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승길로 걷기 시작한 7일째에 이르러 죽은 사람은 부동명왕(不動明王)의 화신(化身)으로부터 첫 서류 심사를 받는데, 바로 이때 생전에 지은 선악의 업보가 기록됩니다.
 14일째부터는 선을 행했던 자에 한해서 석가여래의 화신으로부터 두번째 심판을 받은 뒤 문수보살의 화신, 보현보살의 화신, 지장보살의 화신, 미륵보살의 화신, 약사여래의 화신으로부터 7일간의 일정을 각각 거친 뒤에 저승에 이르게 됩니다. 42.5g의 영혼의 무게로 가는 저승길을 향한 발길은 이승의 것보다 가볍다 할 것이나 저승길도 고행의 연속입니다.
 염라대왕의 이야기는 강경미내다리에도 나옵니다.

 “네가 살 적에 은진미륵과 개태사의 솥, 그리고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

 논산의 전설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저승의 염라대왕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만큼 논산 사람들이 자부할 만한 문화재로서, 그 가치는 높습니다. 어느 하늘이 유난히 높은 어느 가을 날, 미내다리를 찾아 강경으로 왔습니다. 하루 전에 명재고택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갖고 또 맛난 음식을 맛보고 다시 여행의 길목에 나선 오늘에서는.
 강경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논산의 대표적인 다리로 바로 그 앞에 제가 서있습니다.
 강경미내다리(미내교, 渼奈橋, 충남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 541번지, 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는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다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이 강을 ‘미내(渼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해 ‘미내다리’라고 부릅니다.
 긴 돌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 모양를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습니다.
 다리의 강둑쪽 중간쯤에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눈은 마치 장승의 눈과 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모양과 갈기가 있습니다.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으로, 비문에 의하면 1731년(영조 7년) 주민의 필요에 따라 강경촌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해 이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수로정 비에 따라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제방 제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8년 완전해체해 2003년 보수정비를 했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로는 옛날 미내다리 부근의 개울에 다리가 없어 늘 아쉬움을 느끼던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돈을 걷어 두 마을 청년에게 다리를 놓게 시켰다고 합니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쓰고 남은 엽전이 약간 남아,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두 청년은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기로하고 남은 엽전을 모두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고 합니다.
 머지 않아 다리를 놓았던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우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됩니다. 용다는 약을 모두 써보았지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그의 다른 친구가 전에 묻어 두었던 엽전이 있음을 생각하고는 이것을 파내 친구의 병 치료에 쓰려고 다리 밑을 파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을 파도 엽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사이에 병든 친구는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만 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구렁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온 구렁이는 미내다리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이상하게 이 다리는 점점 토사에 묻히게 되고 통행하는 사람들도 적어졌습니다. 그러고서 다시 상당한 세월이 지나게 되면서 미내다리는 거의 폐교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일부 주민들은 다리돌을 마음대로 빼다가 집으로 가져 가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때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치고, 이에 겁에 질린 주민들이 다시 돌을 갖다놓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둥이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미내다리의 돌은 구렁이돌이라 하여 누구든 함부로 손을 대거나 훼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국여지승람’ 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潮岩橋)’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경포구는 한 때 우리나라 상권을 대표하는 포구 가운데의 한 곳이었습니다. 수 많은 배들이 이 미내천을 이용해 교역을 감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경 사람 석설산과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과 스님인 경원, 설우, 청원, 그리고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 등이 다리를 놓기 시작해 1년 미만에 공사를 완성했다고 전합니다.
 특히 부착제, 또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 한 축조방법은, 당시 선조들의 재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지금도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면 ‘강경 미내다리를 살아생전 보고 왔느냐?’고 물을까요.
 정월보름날 이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왕래하면 그 해의 액운이 소멸된다고 하고, 추석날 이 다리를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음이 현실이기를 바랍니다.
 논산원목다리(원항교, 院項橋,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리 193-2번지, 충남 유형문화재 제10호)는 조선시대에 만든 3칸 규모의 돌다리로, 양끝을 처지게 하고 가운데는 무지개처럼 둥글고 높게 만들었습니다.
 1900년(고종 광무 4년)에 홍수로 파괴된 다리를 민간인과 승려들이 돈을 모아서 다시 놓았다고 합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역할을 하던 다리이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리는 연결하지 않으면 생명이 끊기지만, 땅과 땅을, 그리고 마음과 마음을 연결한 순간 그 무엇보다도 견줄 수 없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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