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美邑城, 그 천년의 시간 여행
김동수 010 - 8837 - 5404
▲ 해미읍성 전경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이 높다는 예산군 덕산면(德山面)의 덕산 온천 방면으로 한참을 달리다보면 시원스레 뚫린 편도 2차로의 직선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콧노래 흥얼거리며 또다시 10여분 달리다 보면 면적 61.25 km2. 인구 일만 여명의 아담한 마을이 평화스럽게 펼쳐져 있다. 생산물이라곤 쌀 보리 생강과 마늘 밖에 없는 그 평범한 마을 한가운데 아름다운 산성 하나가 찬연히 기립 해 있다. 마을 전체를 가슴에 포근히 감싸듯 하며 아담하고도 기품 있게 해미읍성은 그렇게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 해미읍성의 가을 풍경
이 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 중에서 그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읍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마절도사로 근무했던 곳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이 읍성은 1491년에 축조된 것으로, 순전히 화강암만을 깎아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으로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둘레 1,800m, 높이 5m의 야트막한 성루에 올라 걷다보면 5백년 전 조상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성안의 넓이만 6만 4,350 m2이다.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원래는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와 왜구의 노략질을 방지하던 곳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안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정부에서는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하였다. 민가 및 관공서가 일차 철거되고 최대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 해미읍성 진남문
본래 읍성의 규모는 동․서․남으로 3대문이 있었고, 철옹산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가 있었으며 태종 18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는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읍지에는 전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복원되어 옛 조상님들의 숨결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성안에는 수령 3백년이 넘었다는 호야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그 나무 둘레에는 보통 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상흔이 있다. 깊이 박혀있는 철사자국인데 사연인즉 1866년 천주교 박해가 한창일 무렵 천주교인들을 그 나무에 묶어 놓고 교살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일부는 나무에 묶여 교살되고 일부 교인들은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돌다리에 패대기질을 당하고 일부는 참수 및 교수, 겨울에 얼려 죽임을 당하기도 하여 죽은 자들의 피가 내를 이루어 내포나루로 흘렀다고 전한다. 그 당시에 이 곳에서 처형된 천주교인들의 숫자가 무려 이천여명을 넘는다고 하니 그 참상을 쉽게 짐잘할 수 있겠다.
▲ 해미읍성의 고풍스런 성곽 전경
지금은 인근에 천주교인들의 순교현앙탑이 깔끔하게 건립되었고, 옛날 김종필씨의 목장으로 동양 최대규모였다는 삼화 목장이 승용차로 7분 거리에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삼화목장의 벚꽃을 보기 위하여 이 읍성에서부터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제 그 옛날의 역사적 상흔은 간 곳이 없고 성곽의 돌 틈에서 피어나는 푸른 이끼만이 옛날의 감회만을 간직한 채 의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