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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충남여행길 공모전 게시판충남을 방문하신 분들의 소중한 기억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저마다의 특색있는 경험을 즐거움과 미소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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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그 천년의 시간 여행

  • 출처김**
  • 등록일2017-09-04 16:47:59
  • 조회수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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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美邑城, 그 천년의 시간 여행

김동수 010 - 8837 - 5404 


해미읍성 전경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이 높다는 예산군 덕산면(德山面)의 덕산 온천 방면으로 한참을 달리다보면 시원스레 뚫린 편도 2차로의 직선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콧노래 흥얼거리며 또다시 10여분 달리다 보면 면적 61.25 km2. 인구 일만 여명의 아담한 마을이 평화스럽게 펼쳐져 있다. 생산물이라곤 쌀 보리 생강과 마늘 밖에 없는 그 평범한 마을 한가운데 아름다운 산성 하나가 찬연히 기립 해 있다. 마을 전체를 가슴에 포근히 감싸듯 하며 아담하고도 기품 있게 해미읍성은 그렇게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해미읍성의 가을 풍경 




이 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 중에서 그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읍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마절도사로 근무했던 곳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이 읍성은 1491년에 축조된 것으로, 순전히 화강암만을 깎아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으로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둘레 1,800m, 높이 5m의 야트막한 성루에 올라 걷다보면 5백년 전 조상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성안의 넓이만 64,350 m2이다.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원래는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와 왜구의 노략질을 방지하던 곳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안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정부에서는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하였다. 민가 및 관공서가 일차 철거되고 최대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해미읍성 진남문

 


본래 읍성의 규모는 동남으로 3대문이 있었고, 철옹산성(甕城)2개소, 객사(客舍) 2, 포루(砲樓) 2, 동헌(東軒) 1,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가 있었으며 태종 18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는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읍지에는 전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 동헌 1, 망루 1개소가 복원되어 옛 조상님들의 숨결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성안에는 수령 3백년이 넘었다는 호야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그 나무 둘레에는 보통 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상흔이 있다. 깊이 박혀있는 철사자국인데 사연인즉 1866년 천주교 박해가 한창일 무렵 천주교인들을 그 나무에 묶어 놓고 교살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일부는 나무에 묶여 교살되고 일부 교인들은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돌다리에 패대기질을 당하고 일부는 참수 및 교수, 겨울에 얼려 죽임을 당하기도 하여 죽은 자들의 피가 내를 이루어 내포나루로 흘렀다고 전한다. 그 당시에 이 곳에서 처형된 천주교인들의 숫자가 무려 이천여명을 넘는다고 하니 그 참상을 쉽게 짐잘할 수 있겠다. 

 

해미읍성의 고풍스런 성곽 전경

 




지금은 인근에 천주교인들의 순교현앙탑이 깔끔하게 건립되었고, 옛날 김종필씨의 목장으로 동양 최대규모였다는 삼화 목장이 승용차로 7분 거리에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삼화목장의 벚꽃을 보기 위하여 이 읍성에서부터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제 그 옛날의 역사적 상흔은 간 곳이 없고 성곽의 돌 틈에서 피어나는 푸른 이끼만이 옛날의 감회만을 간직한 채 의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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